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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바빌론> 해석 (예술의 광기와 고통)

by lulunezip 2025.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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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영화 <바빌론(Babylon, 2022)>은 단순한 헐리우드 찬가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1920년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시기, 광기 어린 열정으로 가득 찼던 예술가들의 이야기이자,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예술의 잔혹함과 고통, 그리고 몰락을 그린 역작입니다. 본 리뷰에서는 영화 <바빌론>이 품고 있는 상징, 구조, 인물의 운명을 통해 셔젤이 말하고자 한 "예술의 광기와 대가"를 깊이 해석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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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빌론>

바벨탑처럼 무너지는 예술의 천국

<바빌론>이라는 제목 자체가 상징하는 것은, 성경 속 바벨탑 이야기처럼 인간의 욕망이 하늘 끝까지 닿을 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영화 속 헐리우드는 바로 그 바벨탑입니다. 모두가 더 높은 명성과 완벽한 예술을 추구하지만, 그 끝은 허무와 몰락으로 귀결됩니다. 1920년대 무성영화 산업은 광기와도 같은 에너지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카메라는 무거웠고, 배우들은 대사 없이 연기로만 감정을 전달해야 했으며, 하루에도 수십 개의 세트장이 동시에 돌아가는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카오스는 단지 시대적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야망과 열정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은유합니다. 셔젤은 영화 초반부터 이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대형 코끼리가 등장하는 파티, 마약과 광기, 소음과 혼란, 외설과 열광이 뒤섞인 장면은 단순한 쇼킹 연출이 아니라, 예술이 미쳐있던 시절의 열기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정점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바벨탑처럼,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순간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다가오고, 캐릭터들은 그 잔해 속에서 길을 잃습니다.

 

인물들의 몰락과 고통: 예술이 앗아간 것들

<바빌론>의 중심에는 세 명의 주요 인물이 있습니다: 성공을 꿈꾸는 멕시코 출신 조감독 매니, 천부적 스타 넬리 라로이, 그리고 고전적 스타 배우 잭 콘래드. 셔젤은 이 세 인물을 통해 예술이 인간에게 어떤 영광을 주는 동시에 어떤 고통을 강요하는지를 날카롭게 그려냅니다. 매니는 성공을 꿈꾸며 헐리우드로 뛰어들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점점 예술과 자본 사이에서 갈등하며, 끝내 자기가 사랑했던 넬리도 구하지 못합니다. 매니의 여정은 “순수한 열정이 어떻게 체계 속에서 소모되는가”를 보여주는 슬픈 기록입니다. 넬리는 광기 그 자체입니다. 그녀는 무성영화 시대의 아이콘이자, 누구보다 생생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유성영화로의 전환은 그녀에게 “적응”을 요구합니다. 넬리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점차 사회에서, 업계에서, 그리고 결국 자신의 삶에서조차 밀려납니다. 잭 콘래드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지만, 영화 산업의 변화 속에서 점점 자신의 자리가 사라져 감을 느낍니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외로이 살아가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이는 “스타는 영원하지 않다”는 냉혹한 현실을 상징합니다. 이 세 인물은 모두 영화와 예술을 사랑했고, 그것에 모든 것을 걸었지만, 결과적으로 예술은 그들에게 보답하지 않습니다. <바빌론>은 예술이 주는 영광 뒤에 감춰진 무정함과 희생의 대가를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냅니다.

 

편집과 음악, 셔젤식 광기의 언어

데이미언 셔젤은 이전 작품들(<위플래시>, <라라랜드>)에서도 강박적 리듬과 음악 연출로 유명했지만, <바빌론>에서는 그 표현의 끝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서사와 감정이 아닌, 편집과 음악 그 자체로 말하는 영화입니다. 음악 감독 저스틴 허위츠는 마치 1920년대와 현대의 사운드를 혼합한 듯한 혼돈의 음악을 만들어냅니다. 특히 영화의 오프닝과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브라스 기반 사운드는 광기, 희열, 혼돈, 추락이라는 감정을 폭발적으로 끌어냅니다. 편집 또한 중요한 연출 언어입니다. <바빌론>은 비선형적 구성과 빠른 컷 전환을 통해, 이성보다는 감각 중심의 몰입을 유도합니다. 특히 파티 장면과 전쟁 촬영 장면 등은 절제보다는 과잉을 택하며, 이는 영화가 의도하는 “과열된 예술의 시대”를 그 자체로 재현합니다. 마지막 10분간 펼쳐지는 편집 시퀀스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트리 오브 라이프>를 연상케 하는 ‘영화에 대한 영화’ 연출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서사를 넘어서,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셔젤의 헌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빌론>은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찬사이자 경고입니다. 영화의 찬란함, 열정, 아름다움이 존재했던 시대 뒤에는 망가진 사람들, 사라진 스타, 남겨진 고통이 있었습니다. 데이미언 셔젤은 이를 무겁고도 열정적으로 담아냈고,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예술이 주는 감동뿐 아니라 그 대가도 마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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