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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바벨>의 서사 구조 분석 (시간왜곡, 사건분절, 시선의 분할)

by lulunezip 2025.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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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리투 감독의 영화 ‘바벨’은 단순한 감정 드라마가 아니라 복합적인 서사 구조를 통해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과 소통의 한계를 강렬하게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특히 시간의 비선형성, 사건의 분절 구조, 다양한 인물의 시선으로 구성된 내러티브는 현대 영화 문법 속에서 ‘바벨’이 지닌 독창성을 돋보이게 합니다. 이 글에서는 ‘바벨’의 서사 구조를 중심으로 시간 왜곡, 사건 분절, 시선 분할의 세 가지 측면을 통해 작품의 깊이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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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벨>

시간왜곡으로 드러나는 서사적 긴장감

‘바벨’은 전통적인 직선형 서사를 거부합니다. 세 가지 주요 사건이 시간적으로 교차하며, 관객은 사건의 순서를 명확히 파악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모로코, 일본, 멕시코라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시간 축에서도 평행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시퀀스는 모로코의 사건보다 먼저 벌어진 것으로 나중에 드러나며, 멕시코 에피소드는 모로코 사건 직후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차되며 펼쳐집니다. 이러한 시간 왜곡은 관객에게 인물 간의 상관관계를 곧바로 제공하지 않고, 점진적인 정보 해제를 통해 몰입도를 높입니다. 동시에 비선형적인 구성은 각 인물의 고통과 절망을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인간 조건으로 묶어내는 데 효과적입니다. 이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소통의 단절’이라는 주제와 맞물려, 시간 자체도 인간 소통의 장벽 중 하나로 작용할 수 있음을 은유합니다. 시간의 재배열은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메시지를 강화하는 수단인 셈입니다.

 

사건의 분절 구조로 형성된 파편화된 현실

‘바벨’의 서사는 사건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 연결고리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모로코에서는 미국인 부부가 총에 맞는 사고가 벌어지고, 멕시코에서는 아이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는 보모의 여정이 펼쳐지며, 일본에서는 청각장애를 가진 소녀의 고립된 삶이 중심입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표면적으로 관련 없어 보이지만, 하나의 총기 거래를 기점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이 후반부에 드러납니다. 이처럼 분절된 사건 구조는 세계화된 현대 사회의 단절된 인간관계를 상징합니다. 하나의 사건이 다른 대륙에서 파문을 일으키는 과정을 통해, 관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얇은 실로 연결되어 있으며 동시에 얼마나 쉽게 단절될 수 있는지를 체감합니다. 사건 간의 인과성은 은폐되며, 우리는 파편화된 현실을 하나씩 꿰어 맞추듯 해석해야 합니다. 이 구조는 영화가 단순한 감정극이 아닌 지적 탐구로서 기능하게 합니다. 또한 이러한 분절성은 주제 측면에서도 ‘바벨’이라는 제목과 직결됩니다. 구약성경의 바벨탑 이야기처럼, 인간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되며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진다는 모티프가 시공간을 초월한 구조적 단절로 표현됩니다. 각각의 사건은 다른 문화, 언어, 배경에서 벌어지지만 공통적으로 고립과 좌절, 소외를 경험하는 인물들을 통해 하나의 주제 의식을 공유하게 됩니다.

 

시선의 분할과 인간 조건의 보편성

이냐리투 감독은 ‘바벨’에서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중심을 두기보다는, 다양한 시선을 병치함으로써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포착하려 합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짧은 시간 동안 관객의 시선을 차지하고, 곧 다른 시선으로 전환됩니다. 이러한 시선의 분할은 특정 진실이나 해석이 존재하지 않음을 암시하며, 복수의 시점을 통해 인간 경험의 상대성과 복잡성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일본 시퀀스에서는 청각장애 소녀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관객은 그녀의 시선을 통해 세상의 소리 없는 고립감을 체험하고, 그녀의 고통이 단순한 사춘기의 감정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반면 멕시코 시퀀스에서는 불법 이민자 여성의 시선이 중심이 되며, 그녀의 실수로 인한 아이들의 위기를 통해 책임과 죄의식, 사회적 소외가 묘사됩니다. 모로코에서는 총에 맞은 여성과 남편, 현지 경찰의 시선이 번갈아 전환되며, 상황의 복잡성과 이해의 한계를 부각합니다. 시선의 분할은 영화의 리얼리즘을 강화하는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사건을 도덕적으로 단정 짓는 것을 막습니다. 누구도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지 않으며, 각자의 시선 속에서 진실은 다르게 구성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벨’이 서사 구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다양한 시선을 통해 인간 조건의 보편성을 조명하는 접근은 현대 영화에서 보기 드문 깊이와 감정의 진정성을 제공합니다.

‘바벨’은 단지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병렬적으로 배열된 작품이 아닙니다. 시간 왜곡, 사건 분절, 시선 분할이라는 정교한 서사 전략을 통해 현대 사회의 소통 불능과 인간 조건의 복합성을 예리하게 드러냅니다. 이 영화는 단지 감정을 자극하는 드라마가 아니라, 인간 본성과 세계의 연결성을 사유하게 만드는 예술 작품입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지금 다시 한번 ‘바벨’을 주의 깊게 감상해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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